공주 곰나루에 한옥마을에서 일박을 했다. 지난밤에 들어 올때는 하늘이 맑았는데
하루 밤새 사이 봄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창문너머 정원에 연못이 더욱 운치있어 보인다.
방 뒷편에는 구들장이 있어 이곳에서 생나무로 방에 군불을 때는 곳이다.
지난밤에는 너 무~ 더워서 밤새 곤히 잠들지 못했다.
장작으로 보온하는 곳을 실제 볼수 있으니 더욱 운치 있는 한옥 임을 알수 있다.
초가집 별채에 웅기로 만든 연돌이 엣모습을 그대로 재현해 놓았다.
서기475년 고구려 장수왕이 이끄는 3만명의 고구려 군은 한강을 건너 백제의 수도 한성을 에워샀다.
개로왕의 아들 문주는 구원군을 청하려 신라로 떠났으나 백제군은 구원군이 오기전까지 버티지 못하였다. 포위된지 7일만에 한성은 함락되고 개로왕이 전사하였다.
신라의 구원군을 이끌고 올라오던 문주는 한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 길로 발길을 돌려 웅진에 새로운 도읍을 정하고 백제 왕조의 명맥을 이어 나갔다.
고구려는 한강유역을 손에 넣은 후에도 남진의 고삐를 늦추지 않고, 지금의 아산만과 영덕을 잇는 선까지 밀고 내려 갔다.
그러나 백제와 신라의 군사 동맹이 힘을 발휘하면서 고구려의 남하 정책은 저지되였다.
고구려가 신라를 공격할 때는 백제가 구원하였고, 거꾸로 백제가 곤경에 빠졌을 때는 신라가 뒤를 도왔다.
공산성 : 수도 한성을 고구려에게 빼앗긴 백제가 웅진으로 도읍을 옮겨 죽조한 곳이다.
금강을 끼고 야트막한 언덕에 둘러싸여 있어 천혜의 요새를 이루고 있으나 재기의 꿈을 키우기에는 지리적으로 적당하지 않았다.
백제 때에는 토성으로 축조 되였으나 조선시대에 석성으로 개축되였다.
이후 문주왕 (475~477), 삼근왕(477~479), 동성왕 (479~501), 무령왕(501~523) 까지 웅진을 도읍으로 정하고 정치적 혼란을 극복하였으며 농업생산을 장려하여 경제적 기반이 튼튼하여졌다.
그 결과 당시 중국의 역사 책에는 " 백제가 다시 강국이 되였다" 라고 기록될 정도였다.
성왕((523~554) 때에는 웅진을 떠나 사비(지금의 부여)로 도읍을 옮겼으며 관료조직과 지방 제도도 다시 갖추었다.
밖으로는 중국의 양(梁)과 활발히 교역하였고 왜와도 긴밀한 관게를 맺어 여러가지 문물을 전해주기도 하였다.